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산 문화 (문단 편집) === 긍정론 === 긍정론에서는 시기적으로 적석총에 앞선 빗살무늬토기도 발견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이형구가 1989년 논문에서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의 호선문(弧線文) 혹은 ‘之’자문토기로 불리는 토기를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으로 왜곡한 것이다. 또한 이형구는 2004년 저작에서는 토기뿐만 아니라 고성 문암리 결상이식을 흥륭와 문화의 것과 연결시켜서 확대 해석했다.(후술) 미송리 유적과 요서지역 신석기문화가 일정 정도 관련성이 있음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북한의 김용간이다. 그는 1963년 미송리 유적의 보고에서 신석기시대 토기를 보고하면서 2점은 ‘찍은’ 그릇 파편이며 나머지 토기들은 ‘그은’ 문양으로 차이가 있음을 파악했다. 동시에 적봉 홍산후라는 유적에서 유사한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이런 무늬 수법을 쓴 것이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지적했다. 뒤에 이 내용은 미송리 유적 하층의 자료를 요서가 아닌 요동의 소주산 하층 문화 혹은 신락 유적과 비교해서, 북한의 편년에도 이를 적용시키면서, 압록강 유역과 요서지역간의 관련성은 수정되었다. 처음 발굴조사 된 1959년과 보고된 1963년 당시에 요동과 요서지역의 신석기문화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서 후에 이를 보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는 40년 이상 지났으며, 중국의 새로운 자료가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요서 지역의 之자문토기가 한반도 빗살무늬토기 계통이라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 이 논지는 이형구의 2009년 저작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2012년 위서 《[[환단고기]]》 역주본으로 이어졌다. 부정론에 '''옥기는 중국에서도 많이 발굴된다'''는 말이 있는데, 옥기가 중국에서 잘 출토되는 것은 사실이나, '''중요한 것은 옥기가 아니라 옥결이다.''' 옥결은 모두 중원지역의 시기가 더 늦다. 옥결은 현재까지 출토된 바에 따라 유추하건대 흥륭와문화에서 처음 등장하여 홍산문화 시기에 황하문명의 앙소문화와 교류하면서 남하한 것으로 본다. 그 이전 시기에 요하 지역과 황하문명 지역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학자 소병기(蘇秉琦)는 논문 "中華文明的新曙光(중화문명의 신서광)"(<東南文化(동남문화)> 제5호, 1988)에서 황하문명 앙소문화가 황하 상류를 통해 북상, 현재의 만리장성 부근을 따라 요하문명[* 국내에서는 요하문명을 문명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중국 학자의 논문이니 넘어가자.] 홍산문화가 남하, 그리고 초원벨트를 따라 북방초원문화가 동진해 만나면서 Y자 형태를 이루어 서로 교역했다는 'Y자형 문화대'를 주장한 바 있다. 요하 지역의 옥기의 약 60%가 한반도 근처인 랴오닝 수암 지역과 약 20%가량이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나는 바이칼옥임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옥은 산지가 한정되어 있어서 성분 분석을 해보면 그 산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만주 지역 옥기는 약 60%가 수암옥, 20%가 바이칼옥이다.]. 추가로 소병기의 학설은 아니지만, 요하 지역의 옥결이 해안가, 즉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 동해안까지, 남으로는 장강 유역까지 전파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를 'A자형 문화대'라 한다. 중국의 옥결이 보통 해안가를 따라 출토되는 것을 보면 이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황하문명 및 이남 지역의 옥결은 홍산문화와 앙소문화의 교류 이후 시기에 출토된다. 그리고 홍산 옥기에는 중국에서는 없는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여러 점 있고 제단 터에서는 희생된 곰 아래턱뼈도 발견되었다. 또한 농사를 지었으며 토기에는 선각 문양을 새겼다. 어쨌든 이와는 무관하게 돼지 머리 용, 사슴 머리 [[용]], [[봉황]] 등의 조각품이 많이 나오는데, 중국정부는 천하제일용(중화제일용)이라고 하여 이 용 유물을 중화민족의 첫 번째 용 유물이라고 홍보 중이다. 물론 이 문화는 중국과도 상관 없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홍산 문화의 이전인 흥륭와 문화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옥들인데 이것이 한반도의 강원도 죽왕면 문암리 유적과 전남 여수의 패총에 흥륭와 문화, 홍산 문화와 똑같은 옥 장신구와 귀걸이등이 발견된다는 것이며 그 옥들이 기원전 6천 년과 7천 년 것으로 흥륭와 문화에서 발굴되는 옥들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 진 것이라는 말이 있으나 문암리 유적의 옥 귀걸이는 02-3호 수혈에서 토기, 석부와 함께 발견됐는데 이때 발견된 토기의 동위원소분석결과상 절대연대는 B.C. 5310~ B.C. 5020년으로 흥륭와문화와 공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흥륭와 문화의 한쪽이 뚫린 옥 귀걸이(결상이식)과 강원도 [[고성군(강원도)|고성]] 문암리의 옥귀걸이는 특징도 다르며, 그것들이 출토되는 양상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같이 출토되는 토기에 큰 차이가 있다. 여수의 안도패총에서 출토된 귀걸이도 귀걸이의 재질이 옥제가 아니라 석제이며(...), 크기 등도 흥륭와 문화의 옥귀걸이와 '''그냥 다르다.''' 그리고 부정론에서 말하는 한반도 농경 BC 1500년설은 잘못된 것이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6천 년부터 시작하며 한반도에서 기초적인 농경과 수렵에서 잡곡등의 농경으로 바뀐 것은 기원전 3500년 전이었다. 그전에도 중국이 장강 문명부터 농경이 일찍 시작된다고 해서 한반도에 똑같은 신석기 시대에 농업과 수렵을 하며 빗살무늬 토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한반도에도 이미 기원전 8천 년경부터 덧무늬토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업과 수렵으로 패총을 만들기 시작하며 말기에는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또한 흥륭와 문화와 홍산 문명도 초기부터 농경을 한 것이 아니며 수렵과 사냥 채집을 하였으며 농경 문화가 특징인 문화가 아니고 옥기가 특징으로 옥기 문화라고도 부른다. 위에 부정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홍산 문명은 농경의 문명에 달하지 않았다"라고 하지 않는가. 수렵이나 농경등의 모든 문화가 이동에서 정주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과정일 뿐이지 먹고 사는 생활 문화인 농경 문화를 문명의 척도로 보지 않는다.오히려 홍산 문명의 농경은 중국의 양쯔강의 장강 문명보다 늦으며 황하 문명 또한 수렵과 어업부터 시작하였다. 즉 홍산 문화에서 먹고 사는 게 사냥이냐 농업이냐가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즉 위 글이 말하는 기원전 5000년에 정확히 말하면 한반도와 가까운 랴오닝성 선양시 북부에서 기원전 8천 년 전부터 시작한 신러 문화(홍산 문화)가 존재할 때도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한반도에 발견되는 7천 년 전의 옥기들이 홍산 문명의 전기인 興隆洼 文化(흥륭와 문화) 와의 옥기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란 것이다.홍산문화와 관계없는 기원전 5천 년의 이야기가 갑자기 농경이 기원전 1500년부터 시작했으니 한반도에 기원전 1500년 전부터 사람의 문명이 있다는 듯이 주장하는데 한반도에서는 초창기 고산리식 토기는 기원전 8천 년부터 시작하며 빗살무늬토기는 흥륭와 문화의 토기처럼 기원전 6천 년부터다. 홍산 문화는 화하족(華夏族)이 창조한 중국의 황하 문명보다 더 오래된 문화라는 것이 주창자들의 주장이다. 여러 문화 중 홍산문화(6,000년 전)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1천여 년을 앞선 것인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문명보다 그 편년이 더 올라가는 셈이다. 홍산문화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 및 문명이라고 자랑하는 이유다.[* 물론 실제로는 애초에 문명과 문화는 다르므로 잘못된 표현이다. 다른 문명들도 그 이전부터 문화가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홍산 문화가 화하족의 중국 문화(장강,황하)와 다르다는 것이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784009&cid=55573&categoryId=55573|#]] 황하 문화가 홍산 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류문화라는 건 중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환빠들이 홍산 문화를 좋아한다고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홍산문화]]'와 '[[한반도]] [[신석기 시대|초기 문화]]'와의 관련성에 대한 진지한 학술적 접근 마저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상고시대에 요하에서 도읍을 정해 기원했다고 볼 수 있는 국가는 고조선이 유일하다.''' 중국에게 요하는 중원의 동북쪽 변방에 있는 이민족의 땅이었을 뿐 중심이었던 적이 없다. 다만 공인된 중국 최초의 고대 국가인 [[상나라]]는 전형적인 특징이 있는데, '''상나라 도성들은 중심축이 동북쪽으로 13도 틀어져 있어서 전부 요하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 학자들은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고, 망해서 동북쪽으로 돌아갔다."고도 말한다. 상나라가 요하에서 발원했다는 점은 중국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0811031740465|은허 발굴 80주년 기념 학술대회.]] 또한 상나라는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다. 난생설화는 동이족에게서 보이는 공통된 특징으로 현재 중국인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한족(漢族)의 원류가 되는 화하족에서는 난생설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홍산 문화에 대한 한국사와의 관련성 연구는 아직 다수파는 아니지만 제도권 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구이며, 계속 발굴되고 있는 유적에 관한 연구이기에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